지난 글에서 중도와 중립이 어떻게 다른 좌표계 위에 있는지를 살펴봤다. 이제는 그 좌표계를 만들어내는 게임, 즉 진영주의 자체로 들어가 볼 차례다. 진영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짚어보자.
진영주의는 단순히 "어떤 입장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나 입장은 가진다. 진영주의는 그 입장을 판단하는 절차 자체가 바뀌는 현상이다. 정상적인 판단 절차라면, 어떤 정책을 마주했을 때 그 정책의 내용과 효과를 먼저 따져보고 결론을 낸다. 진영주의 아래에서는 순서가 뒤집힌다. 먼저 그 정책을 누가 말했는지, 어느 진영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하고, 그 다음에 결론을 정하고, 마지막에야 그 결론에 맞는 근거를 찾는다. 내용에 대한 판단이 출처에 대한 판단의 결과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뒤집힌 순서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이중잣대다. 똑같은 정책, 똑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을 누가 먼저 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우리 진영이 정부 권한을 확대하면 '필요한 조치'가 되고, 상대 진영이 똑같은 일을 하면 '독재의 시작'이 된다. 이런 이중기준은 의식적인 위선이라기보다, 본인도 모르게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관된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 그 머릿속은 결론이 먼저 정해지고 원칙은 그 결론을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로 호출되는 식으로 작동한다.
왜 이런 일이 그토록 광범위하게 일어날까. 여기에는 분명한 심리적 기반이 있다. 사람은 정치적 입장을 신념이나 원칙의 문제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치적 소속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 어느 진영에 속해 있다는 감각은 단순한 의견 모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영의 어떤 정책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의견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확증편향은 이런 심리를 증폭시킨다. 사람은 자기 진영에 유리한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고, 불리한 정보는 더 엄격하게 검증하며 심지어는 부정한다. 이건 지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매우 인간다운 반응이다.
그런데 진영주의를 단순히 '우리 편을 응원하는 마음' 정도로 이해하면 절반만 보는 셈이다. 어떤 진영의 진짜 목표는 신념을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신념을 실제 세상에 새겨 넣는 것이다. 신념을 현실로 옮기려면 표를 모아야 하고, 동맹을 짜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이상에서 몇 발짝 물러나 타협해야 한다. 이 타협은 진영주의가 약해지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진영주의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순수한 이상을 외치는 목소리는 선명하지만 힘이 약하고, 타협을 통해 일부라도 현실화된 결과는 흐릿하지만 힘이 세다. 흔히들 말하는 야합이다. 그래서 진영주의는 자신의 신념을 굳건하게 지키는 사람들과, 그 신념을 현실 정치 속에서 흥정해 관철시키는 사람들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둘 다 같은 게임의 다른 포지션일 뿐, 게임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진영주의는 두 개의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정체성의 층위로, 여기서는 '우리는 옳고 그들은 틀렸다'는 확신이 유지된다. 다른 하나는 실현의 층위로, 여기서는 그 확신을 실제 정책과 권력으로 바꾸기 위한 타협과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 두 층위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의 층위가 동력을 제공하고, 실현의 층위가 그 동력을 결과로 바꾸며 진영주의를 공고히 한다.
이렇게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고 나면, 왜 진영주의가 그렇게 끈질긴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어리석거나 편협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려는 본능과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라는 두 가지 강력한 동기가 동시에 충족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구조가 실제로 어떤 대가를 낳는지, 즉 진영주의가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