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장송의 프리렌」의 세계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마을마다 용사의 동상이 서 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힘멜의 석상. 그런데 정작 힘멜은 없다. 그것도 영영. 이 단순한 사실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은 기념물뿐이고, 기념되는 당사자는 부재한다. 동상은 힘멜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있는 한 힘멜의 부재는 끊임없이 상기된다.
이런 '부재의 존재감'은, 용사의 동상은 마을마다 있는데 파티의 동상은 극단적으로 적다는 데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용사가 빠진 용사 파티'인 현재의 세 사람은 끊임없이 '용사'와 만나지만, '과거의 자신'인 다른 용사 파티와는 재회하지 않는다.
'부재의 존재감'은 단순히 죽음의 슬픔을 가리키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자각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종류의 결핍이다. 프리렌은 힘멜과 10년을 함께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대륙을 횡단한 10년이다. 그럼에도 장례식장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내뱉는 말은 이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도, 왜 더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 고백이 이 작품의 진짜 출발점이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여기서 깨달음이 완성되고, 주인공은 변화한다. 그런데 프리렌의 여정은 그렇지 않다. 작품은 인식의 순간으로 시작해서, 그 인식을 감당해나가는 긴 시간을 펼쳐 보인다. 앎과 수용 사이의 거리, 그것이 이야기의 본체다. 수천 년을 살아온 엘프에게 10년은 찰나에 가깝다. 그 찰나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그녀는 찰나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다.
프리렌이 마법을 수집하며 여행하는 이유를 작품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힘멜에게 하지 못한 것들을 사후에 번역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힘멜이 좋아했던 꽃밭을 찾고,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마법을 모으고, 힘멜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 그것은 추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늦게 도착한 이해이기도 하다.
현재 프리렌의 파티는 흥미롭게도 용사 파티의 그림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이터의 제자인 페른, 아이젠의 제자인 슈타르크. 용사의 직계 후예는 없지만, 용사 파티 멤버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곁에 있다. 이들은 힘멜을 직접 알지 못한다. 힘멜은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부재 속에서 자라난 세대가 새로운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부재는 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현존을 낳는다는 것.
'장송(葬送)'이라는 단어는 보내는 행위를 뜻한다. 슬픔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것. 그렇다면 이 작품의 여정이 도달하려는 곳은, 힘멜의 부재를 망각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부재를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동상이 힘멜의 없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다가, 언젠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현존했다는 증거로 읽히는 순간이 온다면—그 순간이 프리렌의 장송이 완성되는 때일 것이다.
힘멜은 어디에나 있다. 마을마다 세워진 동상으로, 프리렌이 걷는 길 위에, 페른과 슈타르크의 모습 속에. 그리고 힘멜은 어디에도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계속된다.